퇴계 산소를 보기 위해서 안동 시내를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해가 지기에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남아있다는 판단에 다른 곳을 들러보기로 했는데 가기로 결정된 장소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이신 석주(石柱) 첫 번째 아픔 : 지키는 이 아무도 없는 탑, 철길 옆에 버려지다 탑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석탑(石塔), 목탑(木塔), 그리고 전탑(塼塔)이 그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좋은 돌이 없고, 진흙을 구하기 어려운 실정 탓에 목탑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 석탑이 만들어 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탑은 주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탑입니다. 주된 양식이 아니었던 까닭에 우리나라에서 전탑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소수 존재하는 우리나라에 만들어진 전탑들은 대부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 졌습니다. 전탑은 말 그대로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그 벽돌을 쌓아서 만든 탑입니다. 다른 탑과 달리 벽돌을 쌓아서 만든 탑이기 때문에 다른 탑들에 비해서 벽돌과 벽돌 사이의 틈들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는 탑입니다. 이러한 탑이 철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비가 올 때 탑을 보호할 누각이 없는 것은 탑의 규모가 워낙 거대한 탓이라 치더라도, 철길 바로 옆에서 방음벽에 가로 막혀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뽐낼 기회도 빼앗겨 버린데다가 매일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육중한 열차들이 지나다니면서 내는 소음과 진동이 탑을 얼마나 괴롭게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아픔 : 이름마저 틀리게 붙여준 국보 그런데 왜 아무런 연관도 없는 ‘ 덧붙여서 생각해 보자면 원래 탑의 주인이었던 법흥사가 사라지게 된 이유는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이 들어서면서 원래 있던 법흥사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교에 밀려 쇠락해 버린 조선시대의 불교의 아픔을 간직한 탑에게 우리의 실수로 이름마저 잘못 붙여주었으니 어쩌면 우리는 대단한 무례를 범하고도 아무런 미안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아픔 : 누가 이 탑을 이렇게 함부로 대했는가 17m나 되는 거대한 탑의 윗부분은 보기가 힘듭니다. 이 후에 공부해 보니까 탑의 상륜부가 금동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금동 장식부분은 없습니다. 역사적인 기록을 찾아보니 이웃에 위치한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아들 이고가 금동 부분을 떼어다가 집의 집기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웃이지만 아주 고약한 이웃이요, 상종치 못할 사이입니다. 그러나 탑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기단부에서 발견됩니다.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탑의 기단부에는 팔부신중상과 사천왕상이 남아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탑의 기단부를 직접 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흉물스럽게 발라둔 시멘트뿐입니다. 시멘트는 기단부를 뒤덮고 있으며 감실(龕室)마저도 점령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한 일 중에 악행 아닌 것이 없지만 문화재를 수탈해 가고 이렇게 함부로 대한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탑 구경을 마치고 고등학교 때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이렇게 뜬금없이 만나게 된 국보를 보게 되면서 그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가움보다는 더 많은 안타까움을 주는 녀석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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