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_문화재청 당선작

[스크랩] 온갖 실수로 얼룩진 우리 문화재의 아픔, 신세동 칠층 전탑

세네라미 2006. 12. 21. 18:28

  퇴계 산소를 보기 위해서 안동 시내를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해가 지기에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남아있다는 판단에 다른 곳을 들러보기로 했는데 가기로 결정된 장소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이신 석주(石柱) 이상룡(李上龍) 선생님의 생가이자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臨淸閣)이었습니다. 임청각을 둘러 보기 위해 안동댐 쪽으로 차를 돌리고 조금 가다 보니 전혀 의외의 볼 거리 하나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철길에 가려서 삐죽 머리만 보이는 전탑이 바로 그 것이었습니다. 현존하고 있는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전탑인 신세동 칠층 전탑이 바로 그 탑이었습니다.

 

첫 번째 아픔 : 지키는 이 아무도 없는 탑, 철길 옆에 버려지다

 

탑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석탑(石塔), 목탑(木塔), 그리고 전탑(塼塔)이 그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좋은 돌이 없고, 진흙을 구하기 어려운 실정 탓에 목탑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 석탑이 만들어 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탑은 주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탑입니다. 주된 양식이 아니었던 까닭에 우리나라에서 전탑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소수 존재하는 우리나라에 만들어진 전탑들은 대부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 졌습니다.

 

전탑은 말 그대로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그 벽돌을 쌓아서 만든 탑입니다. 다른 탑과 달리 벽돌을 쌓아서 만든 탑이기 때문에 다른 탑들에 비해서 벽돌과 벽돌 사이의 틈들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는 탑입니다. 이러한 탑이 철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비가 올 때 탑을 보호할 누각이 없는 것은 탑의 규모가 워낙 거대한 탓이라 치더라도, 철길 바로 옆에서 방음벽에 가로 막혀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뽐낼 기회도 빼앗겨 버린데다가 매일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육중한 열차들이 지나다니면서 내는 소음과 진동이 탑을 얼마나 괴롭게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아픔 : 이름마저 틀리게 붙여준 국보

 

신세동 칠층 전탑이 서 있는 곳은 안동시 법흥동입니다. 그리고 탑은 부처와 관계된 물건을 모시고 있는 건축물이니 당연히 절과 관련이 있는데 원래 이 탑은 지금은 사라진 법흥사에 세워졌던 탑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신세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일까요? 바로 1962년에 문화재로 등록되던 당시에 실수로 인해서 이 탑의 이름은 신세동 칠층 전탑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수는 정정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까지 국보 16호의 탑은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생각해 보자면 원래 탑의 주인이었던 법흥사가 사라지게 된 이유는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이 들어서면서 원래 있던 법흥사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교에 밀려 쇠락해 버린 조선시대의 불교의 아픔을 간직한 탑에게 우리의 실수로 이름마저 잘못 붙여주었으니 어쩌면 우리는 대단한 무례를 범하고도 아무런 미안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아픔 : 누가 이 탑을 이렇게 함부로 대했는가

 

신세동 칠층 전탑의 모양을 보면 일반적인 전탑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탑의 층 부분에 중간 중간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기왓장의 모습입니다. 일부만 남아있는 기왓장을 보면서 원래는 탑의 층 부분을 기와로 장식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잘 보존 되어서 남아있었더라면 유일하게 기와로 장식되어 있는 전탑을 우리가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7m나 되는 거대한 탑의 윗부분은 보기가 힘듭니다. 이 후에 공부해 보니까 탑의 상륜부가 금동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금동 장식부분은 없습니다. 역사적인 기록을 찾아보니 이웃에 위치한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아들 이고가 금동 부분을 떼어다가 집의 집기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웃이지만 아주 고약한 이웃이요, 상종치 못할 사이입니다.

 

그러나 탑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기단부에서 발견됩니다.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탑의 기단부에는 팔부신중상과 사천왕상이 남아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탑의 기단부를 직접 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흉물스럽게 발라둔 시멘트뿐입니다. 시멘트는 기단부를 뒤덮고 있으며 감실(龕室)마저도 점령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한 일 중에 악행 아닌 것이 없지만 문화재를 수탈해 가고 이렇게 함부로 대한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탑 구경을 마치고

 

고등학교 때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었습니다. 3 때 친구가 학원비를 몰래 들고 나와서 같이 놀러 가자고 유혹했을 때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거절했지만, 행선지가 강진과 해남이어서 매우 거절하기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책에서 내용 중에 가장 공감할 수 없던 부분이 한국은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짧은 여행경력에 본 곳이라고는 수학여행이나 학교에서 단체로 움직이는 것 외에는 없던 저에게는 국토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말은 좀처럼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큰 용기를 내어야만 문화재를 볼 수 있었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이렇게 뜬금없이 만나게 된 국보를 보게 되면서 그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가움보다는 더 많은 안타까움을 주는 녀석이었습니다.

 

직접 탑을 보면서발견한 아픔들도 있었지만 무식함을 타파하고자 탑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면서 알게 된 아픔도 있었습니다. 신세동 칠층 전탑의 여름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진 안에서 벽돌의 틈들 사이로 자라나고 있는 잡초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수모들을 감내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을 뒤로 하면서 어쩌면 이리도 소중함에 대해 둔감할까에 대해 마지막으로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출처 : 문화유산 답사기
글쓴이 : cultfil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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