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_문화재청 당선작

[스크랩] [답사기] 창덕궁, 조선왕조의 영원한 꿈

세네라미 2006. 12. 21. 18:28

  중학교 3학년 시절, 유난히 역사에 관심이 많던 철부지 소녀에게 "우리 역사와 문화재를 지키고

 싶다." 라는 꿈을 가지게 해준 창덕궁. 그 후 3년뒤, 나는 국사학과 수시합격이라는 값진 노력의 결과를 가지고 창덕궁을 다시 찾게 되었다.

"세계 문화 유산 창덕궁" 그 표지 앞에 한참을 서서, 500년의 역사가 잠들어있는 도심속의 궁궐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아름다운 모습은 3년전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돈화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쉬운 생각부터 들었다. 창덕궁을 소개할 때,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궁궐"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수백년의 세월을 견뎌왔지만 튼튼한 금천교)

창덕궁은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자연 있는 그대로에 지어져 특이한점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돈화문을 들어서 일직선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서 건너는 금천교도 그런식의 건축에서 나온 것이다. 금천교는 창덕궁 뿐 만 아니라 모든 궁궐을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건축물이지만, 오늘날처럼 뚝 떨어져나가는 다리와는 다르게 약 600년의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맑은 물이 흐르던 금천은끊긴 왕조와 함께 더이상 흐르지 않지만, 금천교가 이 자리를 지키는 이상 금천은 금천교와 함께 다시 살아 숨 쉴 것이라 믿는다.

 

(▲ 긴 행랑과 넓은 마당, 왼쪽에 있는 문은 '인정문' 직선으로 앞에 있는 문은 '숙장문')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통과하면 왕의 즉위식이나 각종 큰 잔치등을 열었던 넓은 마당이 나온다. 왕들은 이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인정문으로 들어가 인정전 용상에 앉으므로써 왕이 되었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창덕궁에서 가장 큰 건물, 인정전이 서있다. 하지만 칼로 썰어 놓은 듯 네모 반듯한 박석과, 용마루의 오얏무늬(오얏무늬는 '이'씨를 뜻하는 무늬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일개 '이씨의 나라'라고 하며, 왕궁이 아닌 가문의 건물로 격하 시킨 것의 상징물이다) 그리고 텅텅 빈 인정전 내부의 모습때문에, 주인없는 궁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일본은 조선의 궁궐을 제 멋대로 망가트려 놓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다 지은 건물인 희정당이다. 이 때 총독부와 일본인이 맡아서 공사를 진행 하였는데,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하기로" 라는 어이없는 기본방침으로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희정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고, 대조전 뒤편부터는 나무들이 많아지면서 푸른 빛 만이 눈에 들어온다.

왕실의 사람들은 궁궐 밖을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었고 산과 바다로 놀러 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왕실의 정원 후원은 왕실 사람들의 휴식을 담당하는 곳이자, 바쁜 일상의 여유를 찾는 곳이기도 했다. 푸른빛이 돌며 단풍이 들기도 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보며 계절도 후원을 보며 알 수 있었다고 한다.

 

(▲ 부용정과 부용지)

나는 후원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을 부용정과 부용지로 꼽는다. 연못속에 두 다리를 넣은 부용정과 못 가운데에 있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비롯된 둥그런 섬이 너무나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푸른 나무들 사이에 선비가 발을 담그고 있는 자태를 한 부용정, 그리고 둥그런 인공 섬으로 더욱 깊이가 있어 보이는 부용지.

후원에서 더 들어서면 대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99간의 연경당이 나오고, 담까지도 자연에 맞춰 만든 계단식 담을 따라 내려오면 국상을 당한 왕후나 후궁들이 거쳐하게 위해 세워진것으로 전하는 낙선재가 자리잡고 있다.

낙선재는 그 구성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여 특히 20년 전에 지어진 연경당 보다도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낙선재 북쪽의 후원은, 층단진 담장과 벽돌로 쌓은 크고 높은 굴뚝과 화계로 구성하여 지형의 변화를 살려 밝은 공간을 만들고 석분과 괴석 연지 등으로 장식하여 천연스러운 조화미가 아름답게 드러났다.

한폭의 그림과 같은 낙선재를 뒤로하고 향한 빈청에는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건물안에 초헌, 연과 같은 가마 들이 전시 되어 있고 순종 황제가 탔던 자동차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웬 궁궐 안에 유리창으로 싸여진 차고가 있는지 궁금해서 알아보았는데, 이곳이 이렇게 전시용 차고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원래 이 건물의 이름은 '비궁청'이라는 '빈청'이었다. 궁궐에 드나들던 관원들 가운데서 가장 고위관원들의 공간이며, 궐내각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 이었다. 그런 빈청을 '어차고'로 만든 것은, 조선궁궐과 정치문화를 능멸하고 부정하는 일본의 치밀한 계산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빨리 이곳이 다시 정비되어, 예전과 같은 위엄이 다시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관람을 모두 마치고 창덕궁을 나왔을 때는, 빽빽했던 궁궐이 얼마 남지않고 불에 타 텅 빈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우리가 현재는 광복을 해서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궁궐 안에는 조선왕조의 것이 아닌 일본에 의해 왜곡되고 짓 밟혀버린 것들이 수없이 남아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아직도 일제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궁궐복원에 대한 문제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무조건 다시 형체만 잡아서 때깔을 입히는 것이 복원은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궁궐 하나하나를 지을때 모든 것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작은 연못, 작은 문도 그 의미를 알고나면 한없이 커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복원해놓은 궁궐은 그 의미는 철저히 무시해버린, 건물만 위치해 있으면 된다는 형식적인 생각으로 복원된 느낌이었다. 이곳저곳 성의없이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는 길과, 자로 잰듯한 딱딱한 박석 등 조금만 생각하면 가장 조선다운 것으로 고칠 수 있는 것 들인데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안타까웠다.

미래를 보려면 과거부터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창덕궁 관람 후에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과거인 궁궐들과 여러 역사 유적지부터 우리 고유의 형식대로 바로 서야 우리나라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역사 없는 민족이란 있을 수 없고, 우리는 이 역사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사명을 잘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궁궐 아무데나 버려져있는 쓰레기, 큰 소리로 짜증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그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생각하는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이곳이 '궁궐'이 아닌 단순한 '유원지'나 '공원'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행동들을 조금씩만 바로 잡는다면 분명 우리의 궁궐이 제 모습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문화 유산 창덕궁"이라는 이름에 맞는 가장 한국적인 창덕궁이 되길 바라며....

 

 

출처 : 문화유산 답사기
글쓴이 : 선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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