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_문화재청 당선작

[스크랩] 수원에는 화성이 있다

세네라미 2006. 12. 21. 18:26
 

경상북도에서 이곳 수원으로 시집온 지 어언 27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수원은 어느새 제2의 고향이 되어 버렸다.  결혼 적령기의 처녀로 자라난 큰 딸과 낙엽 뒹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엄마, 수원은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쵸? 화성도 얼마나

아름다워요?!“  딸아이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맞아! 난, 효의 도시, 성곽의 도시에 살고 있었지!

등하불명(燈下不明).

나 자신이야말로 바로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팔달산에 오르면 언제나 변함없이 수원시를 내려다 보며 지켜보고 있었던 화성(華城)!

아이들을 키우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을까...내 눈 앞에 200년 전의 화성이 변함없는 자태로 버티고 있었어도 내 마음 속에는

아무런 감흥의 물결도 일지 않았었다....

큰 딸 아이를 마중해 주고 돌아오며, 그래, 적어도 수원시민이라면, 내 고장의 큰 자랑거리인 세계문화유산 화성에 대해서는 알아둘 필요와 의무가 있지!  혼자서 흥분되어 다짐까지 해 본다.

이제사 삶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는 얘기렷다...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토요일이 다가오자, 야학(夜學)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화성 답사에 나선 것이다.

교동에 있는 수원 향교에서부터 수원시 중심에 위치한 팔달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우르르 떼지어 움직이면서 흥미를 유발시키는 학습방법에는 문답식이 아주 효과적이다.

가장 많이 답을 맞춘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도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고 말이다.  화성을 쌓으라 명한 왕은?  거중기를 발명하여 화성을 축조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 정조요!  - 정약용이요!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기특하게도.

음~~ 너희들이 잘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둘째 아드님이 정조였는데,

자신의 아버지 묘소를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花山)으로 옮긴 다음에 화성쌓기가 시작 되었단다.  강력한 왕의 힘을 보여주고 또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서 화성 쌓기가 시작되었는데, 1794년부터 3년 걸려 완공 되었대.  성둘레는 5,744m인데, 지금 우리가 있는 서쪽 팔달산 능선을 따라 장안문을 지나서 지동시장까지 가면 끝나는데, 아마도 우리 걸음으로 2시간 쯤 넘어 걸릴껄?....갈 수 있겠지?

- 예!!

녀석들, 대답은 씩씩하네.

초등 5, 6학년과 중학생인 아이들은 공부하는 것보다 선생님과 같이 바깥 나들이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고, 또 기대되는 것은 화성을 한바퀴 돈 다음에 선생님이 사 줄 간식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고무풍선처럼 손에 손에 하나씩 거머잡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랑받기에 허기진 아이들....

그들은 무엇을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

얘들아, 이 성벽의 돌들 좀 보면서 가자. 이거 모두 200년 전 거잖아.

화성은 사적 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단다.  6.25때 많이 파괴 되었지만, 규장각에 있는 ‘화성 성역의 궤’라는 책에 설계된 그대로 보수했기

때문에 원형대로 남아있는 성이라고 인정받아서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고 그러네.

녀석들은 선생님 얘기를 듣는둥 마는둥 서로 먼저 산을 올라간다고 법석이고 물살이 퉁퉁하게 오른 철희는 땀이 줄줄 흘러서 아예 점퍼를 벗어 들었다.  솔숲을 뚫고 올라오니 얌전한 색시마냥 예쁘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서남암문이 우리들을 반긴다.

얘들아! 거기 적힌 글, 모두 읽고 가야한다!  한 녀석이 큰 소리로 읽는다.  암문은 전시를 대비한 비밀통로로 적 몰래 식량을 들여 오거나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만든 통로다. 서남암문은 유일하게 암문위에

포사 한칸이 세워져 있다.

다음 목표는 가장 우리들에게 친근한 서장대. 그 곳은 팔달산 정상이다.  수원시 중심에 위치한 팔달산은 128m의 나지막한 산이라서 더욱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원이고 휴식처이고 운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기오염도가 높은 수원의 공기를 팔달산이 정화해주고 있는 수원시의

허파같은 존재라고 할까... 팔달산이란 이름 또한 태조 이성계가 사통팔달한 산이라고 하여 명명되었다고 한다.

화성장대. 일명 서장대.

화성의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나 군사훈련을

총지휘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지어진 지휘본부라고 한다.

감동적인 것은 정조대왕께서 능행차시 이곳에서 직접 군사훈련과

불꽃놀이를 참관했다는 사실이다.

200년 전, 이 자리에서 성으로 둘러싸인 수원을 내려다 보며,

왕이라는 지위에 고뇌하며, 개혁을 꿈꾸던 도전적이고 패기에 찬

젊은 한 남자를 떠올려 본다.

정조를 마음 속에 그리면, 그 곁에는 정약용이 함께 떠오른다.

다산 정약용이라는 희대의 실학자요 건축공학자가 그의 과학적인

발명품인 기중기, 거중기, 녹로등을 활용했던 탓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성을 쌓을 수 있었고 공사기간도 단축하여 30개월 만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정조와 정약용...

주말이면 많은 시민들이 화성을 따라서 걷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이 아름다운 성을 쌓느라 피 땀을 흘렸을

이름모를 남정네들의 노고를 한번이라도 마음 속에 떠올리시기를....

역사란,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대 그시대를 어려움과 환란을 극복해가며 살아내어, 자손들을 양육하고 훈계하고 가르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보통사람들의 삶의 속내이야기로 이루어진게 아니던가.     오늘, 이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 위에 서 있을 수 있음에 감격하는 것은 성벽 돌 하나하나마다에서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며 그들의 노고와 희생과 나라에 대한 충정에 고개 숙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난(至難)했던 선조들이 있었음에 그 모진 세월들을 딛고

오늘의 우리들은 평안과 번영의 조국위에, 이 견고한 성 위에 우뚝 서 있음에랴.... 이제 우리들은 화서문을 향해 내리막 길을 걸어간다.

정상에 서 있었음은 곧 내리막으로 향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요소요소에 나타나는 50여개의 시설물이 저마다

독특한 미(美)를 자랑하며 서 있음을 바라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은 지칠법도 하건만, 걷는게 아니라 송아지마냥 겅중겅중 뛰어

달아나고 있다.  아이들 중에 가장 어린 녀석은 정수다.

정수 아버지께서, 화성답사를 한다고 아이에게, 목마르면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귤 20개를 싸 보내셨다. 자상도 하셔라...

정수 아버지는 전업주부시다. 엄마는 일하러 나가시고 아들 둘을 건사하시고 집안일을 모두 하신다. 조그만 사업을 하시다가 실패하시고, 또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어디서건 취업하기가 어렵다고 하신다.

정수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의 손길에 놀라움과 감사함이 교차한다.

정수가 목마른 친구들에게 귤을 줄까말까 까불며 떠드는 사이에 어느새 장안문에 다다랐다. 이제는 평평한 길이 이어지기에 열심히 걸으면 된다. 용의 머리를 단 화성열차가 아이들 곁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는 괴롭다. 평상시 같으면 낭만적인 화성열차에 호기심의 눈빛을 던질 것이지만, 벌써 걷기가 슬슬 지겨워지는 녀석들은 화성열차가 무척

타고싶을 것이니까.  얘들아, 오늘은 꼭 한바퀴 성을 다 돌아야 돼!

쳐다보지 마! 그래도 유혹되는건 어쩔수 없다.  다음에는 꼭 태워줘야지.... 장안문을 지나서부터는 선생님의 설명은 힘겨워지기 시작한다.

앞서가는 녀석들은 너무 멀리, 빨리 가고 있어서 뒤쫒아 가기도 힘드는 상황. 이렇게 긴 성이 200년 전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한다는 것은

예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거기에다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애끓는 효심이 축성의 발로이기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까지 갖는다는 것이다.

중국의 만리장성 위에 서 보았을 때, 물론 대단한 역사적인 구조물이긴 했었는데, 성 위에 길을 내 놓은 것이 특이하다면 할까, 또 일본의

오사카 성을 가 보았을 때, 서양의 성을 닮은 우리의 화성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느낌이 거기에 있었으나, 우리의 화성은 산지와 평지에 걸쳐 축조된 독특한 평산성의 형태라는 점이 비견할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자리매김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장안문을 지나면 수원팔경의 하나인 화홍문이 나타난다.  화성을 관통하는 수원천의 북쪽 수문이 화홍문인데 북수문이라고도 한다.

일곱칸의 무지개 문 위에 단층의 누각을 세웠고 수문 아래로 물이 쏟아지는 물보라의 경치가 수원 팔경의 하나인 화홍관창이라고 한다.

다행히도 쏟아지는 물이 없다. 길 위에서 수문을 내려다 보기도 아찔한데, 아이들이 행여나 떨어질까 무서워서다. 얘들아, 어서 가자 하며

길을 재촉할 밖에.  화성에는 4개의 각루가 있는데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아래에 있는 연못, 용지(龍池)와 함께 그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다. 우리들은 그러나 연못 위에 머리 풀고 꿈꾸고 있는 버드나무만 내려다보며 지나간다. 아이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다.

녀석들은 이제 화성일주가 끝이 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는 듯하다.

와! 봉돈이 나타났다. 얘들아 이건 좀 보고 가자꾸나.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피워 올려서 정보를 교환하고 지방에 전달해 주던 통신 수단이란다. 5개의 화루가 엄마 젖꼭지처럼 튀어 올라와 있다.

선생니임~ 이제 다 와 가요? 응 다 왔어. 슬슬 이런 대화가 오간다.

화성의 끝은 시장과 연결되어 있다. 아이들의 신발은 5km넘는 길을 걷느라 흙투성이 되어 있고, 등줄기는 땀에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했다.

맛있는 간식을 손에든 녀석들은 이제까지의 피로는 싹 날아간 얼굴들이다. 먹을거리에 마냥 행복이란 꽃만 피어올라 있다. 역시 아이들이다!  이 녀석들아, 화성이 너희들 머리 속에 자리잡기나 한거니?

- 예!  대답은 잘한다.

좋아, 무언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한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야. 오늘 화성답사는 무사히 잘 끝마쳤고 너희들은 훌륭히 잘 해냈어. 수고 많았다.  화성이 얼마나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지는 아직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괜찮아.

화성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찾아오면 반겨주고

너희들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존재가 될 거야.

또 다음 세대에도 또 다음 세대에도 함께 해 줄 거야.

우리들은 화성이 있는 고장에 살아서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앞으로도

행복해 할 것이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우리들은 길을 걸으면서도, 공원에 앉아서도, 숲 속을 거닐면서도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아오셨던 선조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이 화성을

통해서 느낄 수 있고, 그들의 넋과도 항상 함께 살아갈 거니까......

 

                     - 끝 -                   

 

 서남암문에서 바라다 본 화성

 서포루와 화성

 화서문을 지나 북포루를 지나서 평평한 성벽길을 따라가면 멀리 오른쪽에 장안문이 보인다.

출처 : 문화유산 답사기
글쓴이 : 손도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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