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_문화재청 당선작

[스크랩] (답사기 공모)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하는 삼랑성

세네라미 2006. 12. 21. 18:24
   시간이 없다. 날씨는 흐렸지만 얼마 남지 않은 마감일을 앞두고 나도 한번 답사기에 도전해 보리라는 마음으로 차를 달린다. 강화를 잇는 초지대교를 건너 1시간여 지나 도착한 곳은 전등사 남문입구다. 언젠가 와 본 낯익은 길이지만, 오늘 좀 특별하게 보이는 건 왠일일까.

  

  입구에 일주문이 없고 대신 나를 반기는 것은 커다랗고 웅장한 성문이 내 앞을 가로 막는다. 겨울의 문턱에 서 있는 단풍잎이 마지막 빛을 발하며 성문을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이 문을 들어갔었다. 그러나 오늘은 삼랑성을 일주하기 위해 남문을 자세히 살피며 들어간다.

  

  사적 제13호로 지정된 이 성의 문은 네 곳에 있고 문루는 남문에만 있으며, ‘종해루’라 명명하였고, 다시 1976년에 남문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남문은 단청의 화려함이 조금은 퇴색되었지만 성을 지키는 임무를 지금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익숙치 않은 실력으로 사진도 몇 컷 심혈을 기울여 찍는다.

 

(전등사쪽에서 바라 본 남문 전경)

 

   남문을 들어서니 성돌이길 일주 약2km(90분소요) 서문까지 650m라는 이정표가 버티고 서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이 산은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 하여 정족산이라 부르며 삼랑성을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삼랑성이라고 한다.

  

  흔쾌히 나와 동행을 해 준 남편의 뒤를 따라 남쪽으로 성을 오르기 시작한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비바람에 무너져 내린 성의 돌과 흙이 누런 속살을 내보이고 있다. 조금만 건드려도 다시 무너질 것 같은 모양으로 위태로운 곳도 있고, 그 옆에 자리하고 있던 나무는 긴 뿌리를 내 놓은 채 불안한 모습으로 서 있기도 하다. 언제 제 모양을 찾을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성은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 가며 쌓았으며 성체 안에는 잡석과 흙으로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다 . 

  

  조금 더 오르니 성은 옛 모습 그대로 역사를 말해 주듯 돌의 색이 검게 변해 있고 가파른 절벽을 이루어 감히 어느 누구도 침입할 수 없을 것 같다. 얼마 되지 않아 능선에 오르니 산 아래로 드넓은 산야와 저 멀리 서해바다가 옅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인다. “와 상쾌하다!” 절로 탄성이 새어 나온다. 바위에 걸터앉아 차 한 잔을 마시니 올라오면서 힘들었던 기운이 모두 날아가 버린다.

 

  능선을 따라 군데군데 나무숲에 묻혀 버린 성의 모습과 산 아래 경치를 보노라니 앙상한 나무 숲 사이로 전등사가 보인다. 사방이 성으로 둘러 싸여 아늑한 자리에 아직은 단풍잎과 어우러진 조용한 산사의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니 일상의 온갖 시름이 모두 사라지는 듯하다.

 

 

 (삼랑성 능선에서 바라본 전등사 전경)

 

  성의 보존이 잘 된 곳은 별로 크지 않은 돌들이 가지런히 아래 위가 직각을 이루어 수백 년을 견뎌 온 것을 보고 그 기술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몸을 내밀고 조심스레 사진을 찍으니 때 아닌 진달래가 계절을 거스르며 분홍빛으로 피어 파르르 떨고 있다.

 

  능선은 높은 성벽과 함께 내리막으로 연결되어 서문에 도착하였다. 이정표가 북문까지는 550m라고 쓰여 있다. 서문은 조그맣게 계곡을 앞에 두고 급경사를 아래로 한 홍예문 형태의 아치형 성곽 문이다. 남문보다 작은 성문이지만 더욱 견고하게 잘 보존되어 길게 연결된 것이 여기부터 정말 성이었음을 실감케 해 준다.

 

  서문 옆에는 서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성곽의 요소에 성벽으로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인 치성(雉城) 이 있다. 서문을 조금 지나니 우거진 참나무 숲이 나를 에워싸고 맑은 공기를 마시라 한다.  비록 잎은 떨어졌지만, 머리까지 맑아진다. 도토리는 벌써 흔적도 없고, 신갈나무, 갈참나무, 떡을 싸서 먹었다 하여 떡갈나무 등, 잎들이 발밑에서 사각사각 합창을 하듯 나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치성을 지나 이제부터 다시 오르막이다. 깊은 숨을 쉬어가며 천천히 산의 정상에 올라오니 사방으로 탁 트여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곳이다. 북쪽, 서쪽에서 올라오는 적군의 동태를 파악 할 수 있는 망루가 있던 자리가 아닌가 한다. 멀리 하늘빛 호수가 지도를 그리듯 선을 그어 놓았다.

  

  다시 길은 두 갈래길, 서북쪽으로 작은 봉우리로 연결되어 길게 뻗어 있는 성은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북문방향으로 쌓은 성은 자연의 산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여  곡선을 이룬 곳이 많다.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성을 따라 도착한 북문은 암문형태로 남아  한 짝의 문도 달 수 없는 좁은 통로에 불과 하다.  작은 문으로 나가니 안쪽에서 보는 것보다 높은 성벽이 하늘에 닿아 있다.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인데도 태양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하늘빛은 조금씩 붉어지고 있다. 이름 모를 식물들은 모두 말라 버리고, 잎을 잃은 작은 나뭇가지 사이에는 새 둥지가 주인을 잃고 쓸쓸히 빈 채로 아직도 먼 날의 주인을 기다린다. ‘꽃과 새들과 함께하는 계절에 오면 좀 더  즐거운 답사 길이 되었을 텐데’

 

  전등사까지 보려면 빨리 가야한다고 걸음을 재촉하며 남편이 서두르기 시작한다.  달맞이 고개에 도착하니 멀리 초지대교와  온수리가 눈앞에 들어온다. 동쪽의 성은 성벽을 더 높게 쌓아 약2m 간격으로 사각형 구멍(총안)이 뚫려 있다. 적과 싸울 때는 총안에 활이나 총을 겨누고 적에게 사격을 했을 것이다. 그 때의 총성이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복원된 성은 계속되어 동문에 이르렀다.

 

  동문은 서문과 비슷한 홍예문 모양을 하고 있고, 전등사로 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지만 성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삼랑성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동문 안쪽에는 양헌수승전비’가 보인다. 헌종 14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이다.  

 

  전등사로 가는 길에 지는 해와 커다란 나무 그늘 때문에 사진이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진종사’라고 하였고, 고려 충렬왕의 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라고 칭하게 되었다.  전등사 안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윤장대를 돌리는 두 남녀가 보인다.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나도 천천히 돌리며 조용히 소원을 빌어 본다. 마음도 차분하게 나를 돌아보게 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전등사라는 현판이 쓰여진 대조루의 계단을 올라  대웅보전으로 들어간다. 전등사는 앞마당을 중심으로 대웅전,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암, 대조루, 범종루, 종각, 적묵당과 요사채가 한곳에서 사방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전등사 느티나무 아래서 바라본 대웅보전)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1621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지붕은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정교한 조각장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중기 건축물로는 최고로 손꼽힌다고 한다. 정면의 문은 빗살문으로 되어 있고,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 나부상을 조각해 놓았다.  마치 원숭이 같기도 한 것이 두 손으로 지붕을 받치는 나부상,  한 손으로 지붕을 받치는 나부상은 이 절의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 나부상에는 대웅전을 짓던 도편수가 아랫마을 주모와 사랑에 빠져 공사가 끝나면 그 여인과 살림을 차릴 결심으로 공사 노임을 모두 주모에게 맡기며 마음을 주었으나 돈에 눈이 먼 주모는 불사가 끝날 무렵 도편수의 돈을 챙겨 도망을 가자 상심한 도편수가 주모와 닮은 나부상을 조각해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주모가 지은 죄를 회계하고 매일 독경소리를 들으며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지붕을 받치게 한 것일까. 알몸으로 상기된 표정이 부끄러운 듯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빌고 있는 것 같아 안스러운 마음이 든다.

  

  특히 건물 내에 시도유형문화재 제48호인 ‘수미단’은 절의 법당 정면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던 대좌이다. 도깨비와 같은 문양이 익살스럽게 조각되어 있고, 중간부분에는 꽃. 나무. 새. 당초문. 보상화문. 상상의 동물 등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다.  그  옆으로 일생의 행실이 나타난다는 ‘업경대’가 있다.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라는 교훈을 주는 마음의 거울이 아닐까.

 

  대웅보전 옆에는 청동수조가 놓여 있다. 스님들이  깨끗한 몸으로 기도하기 위해 손을 씻었던 것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 온다. 마당에는 사백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오가는 사람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은 흔히 보는 우리의 범종과는 형태가 다르게 중국종의 특징을 보인다. 꼭대기에는 좌우에서 쌍룡이 등을 지고 웅크린 모습으로 고리를 이루고 있다.  대웅보전을 닮아 있는 아담하고 예쁜 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보며 올라가는 길에 시원한 약수 한잔으로 마음을 씻고,  정족산 사고지로 향한다.

 

  지난해 겨울, 눈이 쌓인 길을 한참을 걸어 힘들게 오대산 사고지를 다녀왔던 생각이 난다.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되었던 마니산 사고가 병자호란 때 건립되어 이곳에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 총독부에 이장되었다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주춧돌과 계단만 남긴 채 없어진 이 사고는 1999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대웅보전과 좀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한 사고는 여기까지 오르는 사람이 적어서인지 더욱 고요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다시 오솔길을 따라 정족산 가궐지로 향한다. 이곳은 고려 고종 때 풍수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건립 했던 가궐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로 도읍을 옮겼을 때 세워진 궁궐터이다. 성으로 둘러 싸여 요새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 가궐에서 왕이 거쳐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의 생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가궐 터 주위에는 우거진 나무만이 우뚝 서 있어 옛날 이곳이 가궐 터였음을  표시하는 것 같다.

  

(고려 고종 때 지어졌던 궁궐터인 정족산 가궐지)

 

    벌써 우리가 남문을 들어 온지 2시간이 훨씬 넘은 시각, 나오는 길에  다시 감로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이고 내려오니, 이제는 잎이 떨어져 앙상하기만 한 채로 육백년이나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옛날에는 암, 수나무로 짝을 이루었으나, 조선 후기 불교 탄압을 받던 시기 은행나무 열매가 10가마 정도 열리는데 관가에서 20가마를 바치라는 말에  한 스님이 “은행이 열리지  않으면  바치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 아닌가” 하여 은행이 열리지 않게 해 달라고 3일을 지성으로 기도 한 끝에 모두 은행이 열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참 믿기지 않는 기이한 일이다.

  

  이미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버린 것을 아쉬워하며 내년에는 가족과 함께 이곳을 답사하자고 남편과 약속하며 솟대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산사의 찻집에서 들리는 은은한 선율이 솟대위에 머물고,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애써 발길을 돌린다. 오른쪽 산기슭에 세워진 부도가 전등사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모두 나가는 사람들뿐이다.

 

  남문을 바라보며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모습으로 남았던 그때를 지우며 오늘은 내 머릿속의 필름처럼 남아 있는 잔상을 정리해 본다. 성과 함께 고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유적들, 의미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돌조각 하나, 기와 한 장, 추녀 밑 조각품 하나도 생각을 달리하고 본 것이 역사를 느끼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한다. 고난의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의 모습은 당당하기까지 하다 

 

  동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성문을 빠져 나온다. 저녁으로 가는 길목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갈 길을 재촉한다. 옷깃을 여미며 내려오는 길, 시골 할머니들의 채소 파는 모습에 가슴이 시리다. 다시 이 길을 찾는 날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반기겠지.


 

출처 : 문화유산 답사기
글쓴이 : 귀여분오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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