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_문화재청 당선작

[스크랩] 홍진 속의 무릉도원, 담양 소쇄원(답사기)

세네라미 2006. 12. 21. 18:24

홍진 속의 무릉도원, 담양 소쇄원

 

  물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듯, 하늘에는 구름만 떠다니는 것이 아니듯, 소쇄원에는 단순히 정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설레임을 안고 충남 부여에서 담양 소쇄원으로 가는 길을 나섰다. 3년 만에 다시 찾는 그 길을 나섰지만 부여의 하늘은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답사 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동틀 무렵의 풍경은 더 이상 어제의 것이 아니고 새롭게 생동하는 활기로 꿈틀대고 있었다. 남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의지한 채 2시간 쯤 지나니 버스는 전라도 중간을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남쪽으로 내려가니 날씨가 평년과 다르게 화창하고 따뜻했다. 흙빛도 검은 회색에서 붉은 빛으로 바뀐것을 볼 수 있었다. 담양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정읍휴게소에 들렀는데, 어디선가 '~잉'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들렸다. 눈과 마음과 귀가 전라도에 왔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소쇄원은 광주시에서 동북쪽으로 9킬로미터 떨어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다. 소쇄원 뒤로는 장원봉 줄기가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고, 남쪽으로는 무등산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쪽에는 광주호가 있는데, 소쇄원에 다다르니 광주호에서 불어오는 신선과 같은 바람이 내 뺨을 스쳐지나갔다. 다시 한 번 느껴보는 이 시원한 기분이 오감을 충족시키며 어서 올라오라는 손짓을 하는 듯 했다.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첫 길목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웅장하고 우뚝 솟아난 대나무 숲이었다.

 

【사진1】소쇄원 입구 대나무숲 

 

 

  소쇄원은 양산보가 스승인 조광조가 1519년 기묘사화로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으로 지은 정원이다. 이러한 이름에 걸맞게 대나무 숲은 나를 감싸고 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줬다. 이 대나무 숲은 속세로부터 단절된 공간적 구분이자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셈이다. 그리고 양산보는 곧고 굳은 선비의 절개를 대나무를 통해서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굵직한 대나무는 곧게 뻗어 있어 마치 내안에 오랫동안 막혀있던 구멍을 뚫듯 솟아나 있었다. 양산보는 억울하게 과거에서 떨어진 아픔, 스승을 잃은 비통함, 양면성을 가진 정치세계에 대한 불신 등으로 막혀있던 가슴을 이렇게 해소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소쇄원에 오는데 그냥 아무 생각없이 눈으로만 즐겨보고 갈 순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김인후가 소쇄원의 경관을 자세하게 표현한 『사십팔영』이란 시를 읊조리며 과거의 선비들이 느꼈을 그 감흥을 느끼고자 했다.

 

  초정을 지나 긴 담을 끼고 계속해서 걸어갔더니, 오곡문이 나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구문이 있었는데, 담장 밑으로 물을 흐르게 한 것이 인상깊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를 변형시키지 않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우리나라의 조경이 자연친화적이고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수구문은 장대석 같은 자연석으로 담 밑을 받치고 개울 중앙에 자연석을 위태롭게 포개 쌓아서 양쪽으로 도랑이 흐르게 하였는데 불안정한 구도감에도 불구하고 근 5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아무런 문제없이 견뎌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외나무다리에 걸터앉아 수구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냇물을 보고 있으니 내 안에 남아있던 티끌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 한 오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를 김인후는 사십팔영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걸음마다 흘러가는 물결을 보며

거닐면서 시를 읊으니 생각이 더욱 그윽해.

물의 근원이 어디인지 아직 모르고

한갓 담장을 통해 흐르는 물만 바라본다.

 

어쩌면 그도 나와 같이 담장을 통해 흐르는 물을 한없이 바라보면서 자신을 정화시키고 마음을 청하하게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사진2】수구문 - 중앙을 자연석으로 담 밑을 받치게 하고 양 쪽으로 도랑이 흐르게 하였다. 

 

  외나무다리를 지나 개울가로 내려가니 널찍한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가 바로 옛 선조들이 달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는 광석이다. 소쇄원도를 보면 이 바위 위에 사람이 반듯이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있는 바위에서는 거문고를 타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 보인다. 굽이굽이 흐르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광석에 누워 청명한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건너편에서는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거문고를 타며 자연과 더불어 하나 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낭만적이다.

 

밝은 하늘 달 아래 이슬 받으며

너럭바위 돗자리 대신이로세.

긴 숲이 흩날리는 맑은 그림자

밤이 깊어도 잠을 이룰 수 없네.

 

김인후의 사십팔영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바로 광석에 누워 달을 감상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개울가에서 벗어나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니 광풍각이 나온다. 광풍각은 정면과 측면이 세 칸,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형 건물로서, 소쇄원에서 가장 중요한 글방 건물이다. 광풍각에 앉아서 밖을 보니 사방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소쇄원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광풍이란 정자 이름은 송나라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이야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네’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광풍각에 앉아서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읊조려 보니 그 뜻을 가슴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사진3】광풍각 - 사방으로 트여있어 한눈에 소쇄원 경치가 들어온다.

 

  광풍각에서 나와 위쪽으로 돌아 올라가니 소쇄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제월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제월당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에 팔작지붕으로 된 간결한 집이다. 좌측의 한 칸은 간략한 서책들을 둘 수 있는 다락을 둔 온돌방이며 두 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제월당은 면적은 6평쯤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선비가 거처하는 최소 규모이자 최대의 공간이다. 이 곳은 위치상으로도 소쇄원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사의 성격을 가진 건물로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를 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또한 제월당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광풍각의 당호와 같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평한 ‘여광풍제월’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제월당의 마루 위에는 김인후가 쓴 사십팔영의 한시가 목판에 새겨 걸려 있다.

 

  소쇄원은 단순한 개인의 휴양지이자 현대에서 의미하는 별장의 의미를 가진 공간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성리학자라는 것을 항시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주돈이가 행했던 것처럼 무이구곡의 이상향을 지향했고, 정치에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하며 내면을 더욱 공고히 했다. 때문에 소쇄원은 속세의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우주가 담겨져 있는 것이고, 이는 무릉도원으로서 양산보가 지향하는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양산보 개인의 이상향을 넘어서 조선 성리학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 이상향이라 볼 수 있다. 소쇄원이 가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늦가을의 끝자락에 소쇄원을 거닐면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던 옛 선조들의 기개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돌담, 풀 한포기 마다 서려있는 그 신념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소쇄원을 나오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무릉도원을 떠나 홍진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의 느낌이 바로 이러한 것일까? 차마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뒤로 한 채 다시 부여로 돌아오는 답사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 정신적 안식처가 될 이곳으로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출처 : 문화유산 답사기
글쓴이 : 포르토프랭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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