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_문화재청 당선작

[스크랩] 병인양요의 격전지 문수산성을 찾아서(문화유산답사기 응모)

세네라미 2006. 12. 21. 18:14

병인양요의 격전지 문수산성을 찾아서
                                                                글 정진해
  새벽부터 초겨울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오늘 날씨는 종일 비가 올 듯한데 방송에서 오늘은 비 또는 눈이 온 후 서쪽으로부터 맑아지며 바람이 심하게 분다고 하였다. 그러면 문수산성으로 가는 길에 비는 멈출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강변도로를 달렸다. 김포 일산교를 지날 때 쯤 비는 멈추고 서쪽 하늘부터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들판에는 남은 것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채소 한 포기, 벼도 콩도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들판에 아직 물이 들다 만 나뭇잎들은 비에 촉촉이 젖어 그 빛을 더욱 선명하게 해 주고 있다. 은행나무는 노란 잎을 하늘에 날리고 있고 버드나무는 늘어진 가지가 춤을 추고 있다. 통진면 소재지를 벗어나 월곶면 소재지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매우 쾌청하였다. 가끔씩 멀리서 오는 흰구름은 바람에 밀려 동으로 가고 그 사이로 나타나는 햇빛은 답사를 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먼저 찾을 곳은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인 통진향교였다. 입구에서 50m정도 들어가니 멀리 조망할 수 있는 풍화루가 있고 그 뒤에 숨겨진 명륜당과 층층계단 위에 삼문이 보였다. 그리고 높은 담 넘어 대성전이 지붕만 조금 보였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400년이나 버티면서 낙엽을 향교 마당에 가득 쌓이게 하였다. 층층계단을 올라서 삼문중 우측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대성전이 눈 앞에 들어왔고, 좌우에는 동무와 서무가 마주보고 있었다. 대성전은 높은 4단의 기단석을 쌓고 중앙과 좌우 각각 7단의 계단을 두었으며 초석은 4각형의 돌과 기둥은 석재 8각 기둥을 4주를 세우고 그 위에 목재기둥을 세운 것이 특이 하였다. 이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 지붕은 맞배지붕이면서 풍판을 달았으며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옆면과 뒷면은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한 방화벽으로 설치하였고 내부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계단에 사용한 석재는 정교하지도 않으면서 밟으면 편안하게 오르고 내릴 수 있는 계단이었다. 대성전 아래 동무와 서무는 앞면 5칸, 옆면 2칸,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신축한지 3년정도 된 것으로 보이며 삼문은 솟을대문으로 각각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강당인 명륜당은 초라하며 경기도지방의 가옥 구조처럼 중앙에 대문을 달고 그 옆으로 방을 들인 구조이며,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앞면에는 돌과 흙을 이용하여 벽을 쌓고 그 위에 2개의 작은 창을 내었다. 그 옛날 유생들이 작은 창을 내다보면서 들판의 곡식이 자라는 것과 가끔씩 강화로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작은 방에서 열심히 그들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명륜당 앞에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는 높다란 풍화루(樓)가 세워져 있다. 이 풍화루가 향교와 함께 세워졌다면 유생들은 이곳에서 글을 읽고 들판의 변화를 보았을 것이고 여름이면 낮잠을 즐겼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향교는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고 한다.

(통진향교는 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고려 인종 5년(1127)에 창건하였으며 대성전의 장주형 초석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특이하다.) 

 

  통진향교를 모두 둘러보고 문수산성으로 향했다. 통진향교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문수산산림욕장 입구 음식점 옆에 차를 주차하고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하였다. 조금 오르다 보니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초입에는 토지에 제사를 지내는 "토지지신(土地之神)" 제단이 있었다. 경사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머리부터 땀이 나기 시작하였다. 20여분이나 되었을까 온 힘을 다해 성벽에 도착하여 내려다 보니 남쪽 산 아래에는 바둑판식 들판과 유유히 흐르는 염하(강화대교 아래 강같은 바다)와 강화대교 신·구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문수산성이구나 하며 차 오른 숨을 몰아 쉬었다.


  이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보고 있는 해발 376m의 문수산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가,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포용하여 해안지대를 연결한 포곡식의 산성이었다. 현재 염하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은 본래의 것이 남아 있다. 문수산은 서쪽으로 강화도로 건너는 요충지로 고려말 몽고군은 이 산에 올라 강화를 바라보고 건너려 시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문수산성은 숙종 때 영의정 허적이 숙종의 명을 받고 병자년의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대비의 일환으로 "또 통진의 문수산은 강도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병자년에 적이 문수산에 쳐들어와서 장선을 끌고 내려왔는데도 우리 군사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기에 전쟁에 졌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성을 문수산에 쌓아서 웅거하여 지킨다면 적이 오고 가는 것을 피리를 불고, 기를 휘둘러 통지할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숙종 20년(1694년) 지사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문수산성은 아주 강도의 요충이 되는 땅인데, 이미 성을 쌓았다가 문득 버리게 되니 실로 애석합니다. 마땅히 1천여 보(步)를 더 쌓고 통진부를 성 안으로 옮겨서, 갑진과 마주 대하여 험요로 삼을 것이며, 또 김포의 군사를 여기에 소속시켜 전란에 임하여 굳게 지키는 계책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한다. 문헌에 의하면 당시(1694년) 축성된 문수산성은 "둘레가 5,529보이고, 여장이 2173첩에 서문·남문·북문이 있었으며, 강화부에 소속되어 별장 한사람과 군관 161인·사병 56명·돈군 6명·수첩군 80명·모입군 72명 등을 두었으며, 이후 1812년 (순조 12)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세 개의 문루와 세 개의 암문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문수산성은 1866년 9월 7일(고종 3)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룬 곳으로, 프랑스군의 로스제독이 규리르호를 기함으로 하여 포함과 해방함 및 통보함 등 7척으로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곶진에 상륙하여 이튿날 강화성을 점령하고, 18일에는 이곳 문수산성으로 침입하자 봉상시사 한성근이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광주의 별파군 50명을 이끌고 수비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군은 작은 배가 성의 남문 밖에 다달아 정박하자 한성근이 이끄는 수비군이 프랑스군을 기습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포수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하였으며 1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프랑스군은 2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자 성안의 민가 29호를 불살라 버렸고, 해안가의 성벽과 문루 등의 시설이 파괴되고 성안이 유린되었다고 한다. 


  높지도 않으면서 견고하게 쌓은 성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성의 높이는 약 2m정도이며 급경사진 곳은 그 높이를 알 수 없었다. 계속 문수산 정상까지 오르막으로 축성되어 있어 오르는데 많은 힘을 필요로 하였다. 팔각정 정자까지는 한 여름에 피었던 꽃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결과물로 붉게 익은 열매만이 주렁주렁 달려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 개를 따서 입안에 넣어 혀끝으로 맛을 보니 쓰고 달고 시었다. 많은 나무들은 붉고 노랗게 물이 들어 떨어져 갈색빛으로 변해가고 있는 잎들은 바람에 떨어져 있던 자리에서 한창 이사를 가고 있는 중이었다. 산성은 밖과 안쪽으로 돌을 쌓고 그 사이에 잡석과 흙을 메웠으며, 성 안쪽으로는 흙과 잡석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쌓았다. 또한 축성한 돌은 모두 문수산에서 채석한 돌로 쌓은 것이다. 팔각정에 올라서면 발아래 염하와 멀리 강화도 고려산, 혈구산 등이 모두 보이며 멀리 북한의 개성 땅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찬바람으로 몸을 식히고 다시 정상까지 800m의 이정표를 확인하고 또 성을 따라 올라갔다.  지금까지 성을 따라 올라오면서 성의 상태를 보았으나 급경사면과 구릉부분만 조금 무너져 있었다. 양호한 편이였다. 정상을 향해 출발하면서 먼저 접한 곳은 지난해에 복원한 성에 도착하였다.  멀리서도 복원한 성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성밖을 나가 복원된 상태를 보았다. 축성된 석재는 모두 이곳에서 채석하여 쌓은 것인데 남아있는 부분만 그대로이고 그 나머지는 이곳의 석재와는 다른 것이었다. 복원한 것은 좋았으나 축성된 석재가 다르다 보니 본래의 성을 잃어버린 듯 하였다. 홍예문 가까이 갔을 무렵에 쌓은 돌 하나가 돌출되어 무너질 듯 하고 있었으며 그 위에 비삼(碑三), 아래에 비사(碑四)가 새겨진 돌이 있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홍예문에 도착하여 둘러보았지만 이곳은 문루가 없는 동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밖에는 급경사로 이루어져 적이 침입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곳이였다. 원래의 형태로 그대로 남아 있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였다. 6.25 전쟁당시 이곳도 교전이 있었는지 홍예문 주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고 홍예문 양 옆으로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었다. 팔각정부터 이곳까지는 부분부분 성이 많이 무너져 있어 더 무너지기 전에 복원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홍예문에서 정상까지는 400m, 문수사까지 500m의 이정표가 각각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부터는 성밖으로 많은 나무가 무성하여 성의 형태를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곳에서 200m정도 올라가니 중봉이 나타났다. 이곳은 넓은 헬기장으로 주위에는 장의자가 놓여져 있어 쉼터로도 부르고 있는 곳이다. 문수산 정상으로 향해 문수재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200m의 거리이다. 정상까지 밧줄을 잡고 10여분 올라가니 깨어진 기왓장과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정상 둘레는 돌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강화전성과 같이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 놓았다. 그리고 정상에는 문수산 표석이 문수산정상 376m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탁 트인 전망은 북으로는 북녘땅을 조망하고 동쪽에는 김포와 고양 그리고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다리들, 남으로는 인천의 모습, 서쪽으로는 강화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산 아래에는 임진강과 한강에서 만난 물이 염하로 흘러나가고 있고 넓은 들판에는 초록빛과 초겨울의 들판을 보여주고 무리지어 누워있는 집들이 이 고을 저 고을에 있다. 이곳 정상은 적의 동향을 파악하고 지휘를 하던 장대가 있었고 바로 아래에는 여러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문수산성은 사적 제139호로 1964. 8.29에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특히 정상에는 장대터로 아직도 주위에 돌을 초석으로 하고 그 위에 전돌로 쌓은 것이 남아 있다.)

 

  다시 정상에서 내려와 쉼터에서 풍담대사부도와 비를 보기 위해 문수사 방향으로 내려갔다. 가파른 길을 내려와 문수사 초입에 들어서니 "나무아미타불" 표석이 길을 지키고 있었다. 경내로 들어서니 넓은 공터에 우측으로 3채의 작은 건물과 바위 밑에 샘터가 있었다. 샘터는 물이 말라 있었고 공터에는 그 옛날 문수사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로 그대로 비어 있었다. 표석부터 길게 늘어진 연등은 그 빛을 잃었는지 군데군데 떨어진 곳이 있었다. 샘터 앞에 있는 풍담대사부도 및 비 안내판을 지나 올라서니 비로전과 부재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만 모아 놓은 고려시대의 석탑이 우두커니 비로전을 지키고 있었다. 비로전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라는 비로자나불을 모셔놓은 곳이다. 앞3칸 옆2칸의 규모로 단청은 다른 사찰 건물과 다름없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이곳을 지나 좁은 오솔길을 100m정도 가니 풍담대사의 부도와 비, 대한민국불교영산작법 중요무형문화재 제150호 어산종장 벽응당대종사대탑비와 벽응당재종사 불모비가 있었다. 이 부도와 비는 문수사 비로전의 뒤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등성마루의 끝에 위치하는데, 이 곳은 서쪽으로 강화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훌륭한 조망지이다.


  풍담대사는 신라 공혜왕때의 대사로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일원의 사찰과 주민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불교를 전하고 한강하류를 도하하여 오던 중 문수곡 문수사에 다다랐다. 여생을 불교를 전파하며 절을 더욱 번창하게 하여 그 뜻을 전하기 위해 대사가 금강산에서 입적한 후 3년이 지나 조선 현종 9년(1668)에 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와 사리탑인 부도를 세웠다. 비는 매산공(휘, 하진)이 쓰고 판중추부사 조경이 글을 지었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는 이 부도는 방형지대석 위에 8각형의 기단부를 설치하고 하대의 각 측면에는 안상이, 윗면에는 복연이 조식되어져 있다. 상대석 측면에 안상이 새겨져 있는데 하대와는 달리 구획이 나눠진 각 면에 안상이 2구씩 배치되었고 윗면에는 복련이 새겨져 있다.

(문수사 풍담대사부도 및 비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1호로 1979.9.3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부도와 비를 둘러보고 다시 산성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산성까지는 매우 가파른 길이다. 오솔길을 따라 15분 정도 헐떡거리며 올라간 곳은 정상 바로 옆이다. 북한의 벌거벗은 들과 산이 눈앞에 바짝 다가서 있고 강물은 여전히 소리없이 잠겨만 있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여기부터 매우 가파른 산세를 따라 성은 계속 이어졌다. 가파른 길을 내려가다 갑자기 성이 보이지 않았다. 산세를 따라 축성된 성이라서 산이 앞으로 나가 있으니 산의 모양대로 성을 쌓아 치성 형태로 되어 있었다. 성 끝에 서서 보면 산아래 곳곳을 조망하기에는 매우 좋은 곳이었다. 이곳을 돌아 구릉지에 내려가니 암문이 나타났다. 조그마한 문에 사각형 형태의 문이 덩그러니 서 있고 암문 앞에는 무너진 석재가 누워 있었다. 다시 북쪽 성을 따라 가니 또 다른 치성형태가 나타났다. 이곳에 서서 보면 북녘땅이 다른 곳에서 보는 것에 비해 더 선명하고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뒤돌아 북문을 향해 내려갔다. 가파른 길을 따라가면서 뒤돌아 보니 성의 형태가 잘 나타나 있으며 무너진 곳이 다른 곳에 비해 많지 않았다. 매우 경사진 곳을 내려오니 북문루가 북쪽을 보고 서 있다. 이곳에서 남문루까지 2km의 거리에 성이 있어 서문루가 있었는데 모두 무너져 없어졌다고 한다. 북문루에서 남문루를 향해 가다보면 '문수골'이란 표석이 나타나고, 100m정도 더 내려가면 '문수산산림욕장'으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통해 문수산 등산을 한다. 다시 100m 정도 길을 따라 가면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문화재 안내판이 있어 주위를 살피니 해당 문화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집 우측으로 돌아 철조망이 처진 염하를 보니 그곳에 돌로 쌓은 석축로가 염하로 길게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갑곶이란 명칭은 고려 23대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을 하여 강화도를 몽진할 때 이곳이 대안과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정묘호란 당시 인조임금이 건넜던 사실이 있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봉림대군이 수어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인양요 때에는 격전을 치룬 역사적 실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500m정도에는 근래에 복원한 남문이 산성의 끝임을 말해준다. 이곳에 올라서니 가장 눈에 먼저 띄는 것이 문화재 안내판이였다. 언제 세웠는지 문화재 안내가 새겨진 글씨와 사진자료는 없어져 이곳을 찾는 많은 학생들이나 답사객들은 아무도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하루 빨리 안내판을 누구나 보고 문수산성에 대한 정보를 얻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산성에 올라서면 끝없이 조망할 수 있어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써 손색이 없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강물과 북녘땅, 서쪽으로는 염하와 강화도,동쪽으로는 한강과 고양과 서울, 남쪽으로는 김포와 인천 그리고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문수산성을 답사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인이 되어 함께 가꾸고 배워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오래 기억될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었던 이곳엔 내일도 그 역사적 사실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우리의 역사를 배울 것이라 생각된다.  끝.

 

 

*. 답사일 : 2006년 11월 15일

출처 : 문화유산 답사기
글쓴이 : 국보와 보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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