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_문화재청 당선작

[스크랩] <문화유사답사기>금정산 범어사

세네라미 2006. 12. 21. 18:09

<금정산 범어사를 다녀와서>

 

 남쪽지방에는 발 느린 단풍들이 이제야 제 빛깔을 뽐내며 늦은 가을이 한창 익어가고 있다. 창문을 열고 뒷산을 물들인 나무들과 잔 바람에도 여지없이 떨어져 내리는 낙엽비들을 바라보다가 언뜻 모든 것은 안개와 같고 이슬과 같다는 불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듯 자만하고 으스대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들이 햇살이 떠오르기만 하면 부서져 버리는 이슬과 같고 안개와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순간 또한 거짓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점점 흐려져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언제나 그 곳에 가면 내 머릿속을 물로 씻은 듯 정화시켜주는 한 소리가 있음을 떠올린다. 하늘을 나는 물고기가 울려주는 경종의 소리! 범어사 대웅전 처마에 걸린 풍경소리는 갈 때마다 내 흐린 마음과 머리를 깨끗하게 울려주는 그리움과 정화의 소리였고, 오늘 문득 다시금 그 곳의 맑은 풍경소리를 듣고 싶어 집을 나섰다.

 

 속진을 걸러내는 체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집을 나서 범어사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빗방울이 제법 떨어지고 있었다. 주변에 새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의 잦은 왕래로 편도 2차선 도로까지 나 있는 범어사 진입로는 인공의 냄새가 짙다. 하지만, 그 인공의 힘도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지 곱디 고운 가을 산의 자태를 가리지는 못하는 듯 했다.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 그리고 가을비를 맞으며 무리 지어 떨어지는 나뭇잎들, 모두가 사람 손이 가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비와 섞인 땅과 나무 냄새는 멀리서 들려오는 독경소리와 어울려 그 어떤 협주곡보다 운치 있게 들렸다.
 지금은 작정을 하고 등산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범어사 초입에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주차장이 있는 곳까지 차로 이동해 버리면 어산교(魚山橋)의 멋드러짐과, 사역(寺域)의 시작을 알리는 4미터의 당간지주를 비롯한 여럿 비석을 보지 못하게 되기 십상이니, 범어사의 제 모습을 볼 요랑이라면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이다. 
 당간은 사역의 시작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범어사의 격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헛으로 보아 넘길 수 없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하여 좌우에 당간이 지탱할 수 있게 세운 기둥으로 지금은 간석(竿石)과 기단부(基壇部)없이 지주만 남아있다. 둔중하지만 소박한 맛이 일품인 범어사 입구 당간지주를 곁으로 두고, 금정산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 곧 성역의 문지방에 해당하는 일주문이 보인다. 하지만, 일주문이 보인다고 해서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전까지는 쉽게 다다르겠거니 하면 오산이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천왕문에서 불이문까지 그리고 불이문에서 첫 법당인 보제루까지 닿으려면 산을 오르고 하늘을 오른다는 마음으로 길고 가파른 석계를 밟아 올라가야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길고 가파른 길을 올라가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속세를 털어 내고 참된 마음을 가다듬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주문에 닿기 전에도 이미 굽은 길과 어산교,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 긴 오르막길을 차례차례 밟아오면서 속세의 기운들을 털어 낼 시간은 가졌지만, 일주문을 넘으면서 비로소 성스러운 느낌을 최대로 받게 되는 것이다.
 범어사의 길과 계단과 법당의 구성을 두고 히에로파니적(성현(聖顯), hierophanie) 공간구성이라고 했던가! 대웅전으로 가기까지 천천히 걷다 보면 그 성스러운 과정들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한 굽이 돌아가고 한 계단 오르다 보면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대웅전에 가 닿기 전에 마음은 평화로워져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범어사 대웅전에 가 닿기 위한 길을 두고 속진을 걸러내는 체의 역할을 해 주는 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통해야 하는 곳마다 일주면, 천왕문, 불이문 등 문루를 세워두고 한 문루에서 다른 문루까지는 가파른 석계를 쌓아 오르게 하여, 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모아 삼배하면서 속세를 털어내게 하는 체가름 수법이 바로 범어사, 이 곳에 있었다.
 몇 번의 삼배와 가픈 숨을 내 뱉다 보면 어느새 내가 살았던 속세가 저 먼 아래 어디쯤으로 멀어져 가고내  얼굴엔 가볍고도 편안한 미소가 지어진다.

 

<범어사 일주문>

 

 

 비로소 드러내는 화장세계여!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불이문(不二門) - 이 문을 본당에 들어서기 직전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지금까지 올라온 돌계단보다 훨씬 가파른 30단의 석계를 오르게 된다. 불이문에서 올려다 보이는 보제루의 뒷모습을 보면 드디어 속세를 떠나, 다른 한 세계에 당도했음을 예감하게 된다.
 30단의 맨 위에서 올라서서 보제루를 등에 업고, 다시금 뒤돌아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어산교를 지나 당간지주가 있던 길을 지나 일주문 천왕문, 그리고 방금 지나온 일주문까지 주욱 한 길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줄곧 한 방향을 이루며 이루어진 먼 길을 바라보고 잠시 서 있으면 성스러움의 절정과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착각까지 하게 된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보제루와 좌우로 심검당과 미륵전이 있는 절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길고 긴 길을 올라온 속인을 위해 비로소 문을 열어준 화장세계, 부처님의 미소가 있는 곳이다. 들머리에 선 보제루를 등에 지고 위를 올려다보니, 가장 높은 곳에 범어사 대웅전이 보인다. 뒤로는 산마루까지 내려온 구름이 지나는 금정산이 병풍같이 드리워져 있다. 내가 간 날은 마침, 망자를 위한 49재가 있던 날이어서인지 길고도 애달픈 불경소리와 삼베옷을 입은 슬픔에 젖은 사람들이 보제루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큰스님이 주재하는 특별한 기도가 있다는 안내문과 함께,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재빛옷을 입은 보살님들의 모습이 제법 많이 보였다.
 절마당에 들어서면, 우선 오른쪽으로 종루가 객을 맞아주고, 보제루를 끼고 돌아서 들어서면 심검당과 미륵전, 비로전이 감싸듯이 서 있고 3층 석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석등이 비를 맞으며 절 마당을 오롯이 지키고 서 있다. 산사를 찾아온 낯선 객인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대웅 전 아래 부복한 느낌을 받는다. 저 먼 아래에 있는 어산교를 비롯해 모든 문루와 석계, 그리고 보제루를 포함한 절마당의 법당들과 그 아래서 걸어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화장세계에 있는 부처님 앞에 오체투지로 엎드린 형상이 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절마당에 내리는 가을비마저도 부처님 앞에 끝없이 엎드리며 절을 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범어사의 대웅전이 어찌하여 그토록 높은 곳,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지, 그 아래 서 본 사람은 알 수 있으리라.  

 

<범어사 대웅전>

 

 

 

 비 오는 날의 풍경소리
 무릇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옮겨 적으면 불경이 되고,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으로 옮겨놓으면 불상이 되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옮겨놓은 것이 있다면 범종소리라고 했던 글귀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편히 쉴 때 내는 숨소리를 옮겨 놓아본다면 어떤 소리일까? 그것은 바로 법당의 처마 끝에서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아닐까, 싶다. 보고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 - 본당에 들어서서 가장 어렵지 않고 편안한 부처님을 만나 뵙는 순간이 바로 풍경소리를 들으며 그 곁 기둥에 가만히 기대 서 있는 순간일 것이다.
 대웅전은 범어사에서도 정확하게 가장 중심의 자리에,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좌로는 팔상전, 독성각, 나한전이 우로는 관음전이 대웅전으로 협시하는 형상으로 나란히 서 있다.
 절마당에서 20단의 석계를 올라야 이르는 범어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은 창사 때부터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의 건물은 광해군 6년(1614년)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조선중기이전의 간박하고 힘찬 다포식 가구의 양식적 특성과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대웅전은 목조건축 양식 발전을 연구하는데 크게 주목된다고 한다. 벽면의 벽화들도 매우 훌륭한 작품들로, 대웅전은 현재 보물 제 434호 지정되어 있는 중요한 건축 문화재이다.
 대웅전 앞에서 삼배를 올린 다음, 관음전을 돌아 다시 절마당으로 내려서면 보제루 곁에 서 있는 종루가 눈길을 끈다.

  2층 누각에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규모로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등 사법물(四法物)을 갖추고 있다. 그 앞에서 눈을 감고, 언젠가 새벽 예불을 하기 위해 들렀던 절에서 울려퍼지던 법고의 웅장한 소리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가슴을 울려대던 소리, 천지를 깨우는 소리가 바로 이것이구나! 실로 감동적이었던 그 소리가 지금이라도 당장 다시 울릴 것만 같아, 한참동안 법고를 올려다 보았다.

 

<대웅전 풍경>

 

<범어사 종루>

 

 

 

 산문을 나서며
 일주문을 통해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금정산 등산로와 이어지는 길로 나서 본다.

 스님들의 선방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건물의 벽면을 따라 걷다가 문을 나서면 대나무 숲이 안으로 보이는 담장을 타고 걸어내려오게 된다. 옆으로 커다란 돌덩이들이 콕콕 박힌 개울이 있고, 발 밑으로는 가을비에 떨어진 단풍잎과 은행잎들이 즐비하다. 
 내려오는 발걸음은 들어설 때보다 훨씬 가벼워지고 머리와 가슴도 새롭게 정화된 듯 말끔한데 눈길만은 더없이 부지런해진다. 내려오면서 다시금 서서 바라보게 되는 당간지주며 비석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뒤돌아 서서 올려다보게 되는 일주문, 그 안으로 이어질 긴 돌계단, 그 끝에 다다르게 될 대웅전까지! 모두 눈 안에 담아두고 싶다는 섣부른 객의 욕심으로 발걸음은 가다 멈추고 다시 멈추고를 되풀이하며 어산교를 건넌다.
 언젠가 또 다시 마음속에 속세의 때가 묻고 묻어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을 때는 이 길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속진의 때를 벗게끔 해 주는 체의 역할을 해 주는 이 긴 길을 걸어 대웅전에 당도하게 되면 본존불상의 자비로운 미소 한 번으로 마음이 풀어질 것이고, 대웅전 기둥에 붙어 서서 오래도록 풍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다시금 속세에서 버티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힘 때문에 우리는 오래된 사찰을 찾게 되는 것이고, 멀고 먼 우리의 과거와 역사를 찾아다니게 되는 것이리라.

 닳지 않고 낡지 않은 과거는 지금을 살아가게 하는 본바탕이 되어주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역할까지도 해 준다는 엄연한 사실을 금정산 범어사를 나서며 깊이깊이 확인하게 된다.  
 
 
 
 

 

 

 
 


 

출처 : 문화유산 답사기
글쓴이 : 강희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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