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매월당의 용장사엔 이름모를 무덤만이 쓸쓸히..... -경주 남산 용장사계곡 답사-

세네라미 2006. 11. 29. 22:05
 

 그리 높지 않으나 그렇다고 산보하듯 설렁설렁 가게도 하지 않는 산, 남산.

 금오산(金鰲山) 468m. 서라벌의 진산인 남산의 최고봉은 실은 금오봉이 아니라 고위봉(494m)이다. 그러나 남산의 주봉은 금오산으로 삼기에 이곳에 표지석을 세운 것이리라.

 이곳 금오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씌여진 용장사가 있는 곳으로 국어시험에 꼭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김시습은 세종 17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다. 열다섯에 부모를 잃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하던 중 단종애사때 스스로 '설잠'이라 칭하고 출가하게 된다. 전국을 떠돌던 중 1465년인 세조11년에 이곳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이라는 집을 짓고 입산하여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짓게 된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이곳 지명에는 매월당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하산길에 만나게 된 다리 이름도 '설잠교'라 칭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보니 아무런 배경지식없이 지날 때 보다 자세히 둘러보고 살펴보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개안하고 난 이후에 보는 것은 그 이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법. 그러한 이치를 알고 있음에도 늘 떠나는 여행길에 기본조사도 하지 않고 떠나는 게으른 나를 반성하게 된다.


 금오봉을 지나고 나면 약간의 내리막을 지나 조망이 확트인 안부를 만나게 된다. 주변을 둘러보니 시원한 눈맛이 그만이다. 헬기에서 경주를 내려다보면 명당중의 한 형태인 '연화부수형'을 띄고 있다고 한다. 물위에 떠있는 연꽃의 형상처럼 겹겹이 안온하게 쌓인 곳이라는 의미로 서라벌의 넓은 들을 산들의 어깨쌈으로 싸고 있어서 아늑하기 이를데 없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천년을 지탱해온 고도로서 손색이 없는 명당터임이 문외한인 나에게도 느껴진다.

 늦가을을 아쉬워하듯 살랑이는 갈대와 저 멀리 보이는 평온한 산흐름이 시선을 붙잡아 발걸음이 더뎌진다. 앞서간 일행들을 기다리게 한 미안함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마사길 내리막을 지나 바위길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저 아래 가파른 곳에 왠 탑이 하나 떡 서있는 게 아닌가! 한눈에 봐도 서라벌을 내려다보는 기막힌 위치에 서있다.

<사진설명: 용장사곡 삼층석탑> 용장사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 돌 하나에 지붕틀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틀과 몸틀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틀은 상당히 높은 현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틀은 밑면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바위 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


 바로 ‘용장사곡 삼층석탑’. 탑 하나가 있기에도 넉넉지 못한 공간에 절까지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갸웃거리던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실감케 한다. 자연암반을 기단삼아 당당히 서서 천년 세월을 지탱해온 모습이 참으로 조화롭게 느껴진다. 새삼 선조들의 눈밝음에 감탄을 하고 만다. 더구나 이 용장사탑은 용장사 골짜기 아래쪽 어느 곳에서 보아도 보인다고 한다. 그 로케이션의 센스가 참으로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그 장엄함에 취해 한참을 머무르다 다시 길을 재촉하나 내려가는 발걸음이 더디다. 눈 밝은 조상 덕에 내려다보는 호사스러움은 느꼈으나 구경 값은 톡톡히 치뤄내고야 만다. 역시 세상엔 공짜란 없는가 보다.


 조심조심 식은땀을 흘리며 내리딛어 이제쯤 쉬어가고픈 맘이 들 즈음 다른 세상에서 나타난 듯한 불상을 만나게 된다. 바로 ‘용장사곡 석불좌상’. 이 불상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 불상에서처럼 1단의 연좌가 아닌 삼륜의 대좌위에 높직이 앉아 계신 것이다. 아래에서 한참을 올려다볼 만큼 그 높이가 제법이다. 불상이 아니라 마치 무슨 탑인 듯 하다.

 <사진설명: 용장사곡 석불좌상> 용장사터에 있는 미륵장육상으로 추정되는 석불 좌상. 삼륜대좌 위에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1932년 일본인에 의해 복원된 것으로 머리 부분은 없어졌다.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는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이다. 목에는 3줄의 뚜렷한 삼도(三道)가 있고 어깨는 넓지 않고 다소 좁은 편이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좌측 어깨에는 매듭지어진 가사끈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석불은 특이한 둥근 형태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준다. 제작시기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


 용장사터에 있는 ‘미륵장육상’으로, 신라 유가종에서 모시던 불상으로 추정한다고 하나 나는 영 불만이다. 대개의 불상이 관찰자의 시선에서 30도를 넘지 않는데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바라볼 수 있게 되니 이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 불편함에 불만을 가진 무엄한 인간이 또 부처님의 미소를 훔쳐가버렸다. 불만은 불만으로 끝낼 것을 꼭 그렇게 표현을 해서 후세들 마음을 아프게 해야겠는가! 앞서간 그 무엄한 인간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불만스럽긴 하지만 그 높이만 만족스럽다면 부처님의 조각솜씨가 참으로 현란하다. 가사 장삼자락이 섬세하게 마치도 펄럭이는 듯 묘사되어 있는게 아닌가? 키만 자란다면 한번쯤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불편한 중생의 마음을 헤아렸을까? 바로 옆 절벽바위에 여래좌상을 조성해놓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용장사곡 마애여래좌상’으로 통통한 법신에 복스러운 얼굴이 꼭 떡두꺼비 같은 아들 느낌이 난다. 아들을 소원하던 불심 깊은 보살들의 손길을 좀 탔을 법도 하다. 삼륜대좌불을 올려다보느라 뻣뻣해진 목을 후덕해 보이는 여래불을 보면서 풀어본다.


 바위길이 끝나고 육산을 만날 즈음 오른쪽 대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발걸음 끝 평평한 터에 왠 봉분 2기가 자리하고 있다. 문득 매월당의 묘인가 싶어 지석을 살펴보니 벽진 이공과 또 다른 성씨의 묘가 아닌가! 그 뒤쪽으로 단이 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슨 절터인 듯 싶어 안내판을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금오신화'의 산실인 용장사터가 아닌가.

 워낙이 들어온 이름이라 제법 규모가 있을 법 했는데 초라하기 그지 없을 정도로 그 터가 작다. 마치도 암자 정도 있을 만한 자리정도로 쓸쓸하고 고적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러한 쓸쓸한 소회를 매월당은 이렇게 '용장사'라는 시로 남겼다.


/용장골 깊어 오가는 사람없네/

/보슬비에 신우대는 여울가에 움돋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 희롱하는데/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네/

/의자에 먼지가 재처럼 깔렸는데/

/깰 줄 모르네 억새 처마 밑에서/

/들꽃은 떨어지고 또 피는데/


 <사진설명: 용장사터>


 맷돼지가 다닐법한 조릿대길을 내려가다 되돌아와 다시금 샛길이 갈라지는 곳으로 나와 산 아래가 다다랐음을 알려주듯 평지가 나타난다. 그곳에 자그마한 현수교 모형이 나타난다.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편안하게 놓여진 다리니만치 기꺼운 마음으로 다리를 건넌다.

 다 건너서 돌아보니 '설잠교'란 이름이 붙어있다. 설잠이라 함은 매월당이 출가할 때 썼던 이름이다. 다시금 도지는 시대의 경박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 이름을 따서 다리를 지을 것이면 그럴 듯하게 세워도 될 것을, 어설픈 금문교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늦가을에 피어난 얼빠진 진달래를 놀리며 남산 아랫자락에 다다라 뒤돌아 본 남산이 그렇게 새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저 뒷산에 그토록 장엄한 불세계가 펼쳐져 있을 줄이야. 새삼 이 땅에 태어난 내가 그렇게 행복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지나온 남산의 길이만큼의 포장도로를 지나 시장기를 달래러 유명한 경주쌈밥집을 들러 정신의 포만함에 비례하는 육신의 포만감을 즐김으로써 남산의 하루해를 마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