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삼릉계 소나무는 꼭 경주다웠습니다. -경주남산 삼릉계-

세네라미 2006. 11. 29. 21:19
 문화답사에 눈뜬 후로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경주남산. 마음속에 숙제처럼 자리하고 있던 그곳을 이제야 비로소 만나러 간다. 인연이 닿지 않았음을 핑게로 하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요, 덕의 부족이리라. 덕많은 인솔자의 정성을 나누어 받아 떠나는 길엔 설레임과 정겨움이 함께 한다.

 그 속에 담고 있는 문화재의 품격과 무게로 치자면 국내 어느 곳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문화의 보고인 '경주국립박물관'앞에서 일행과 반가운 해후를 한다.

 박물관 입구에는 늦가을 마지막 남은 벚나무 단풍잎이 흐린 하늘빛과 조화를 이뤄 슬픈 붉음을 배어내고 있다. 고개 숙이면 '또르륵~~~' 눈물 한 방울 떨어질 듯한......

 

 늦가을의 단상을 무참히 깨버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요란하게 박물관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마도 재촉에 못이겨 여행처럼 나온 어린 학생들이리라. 넌지시 그중의 한 학생에게 물어본다.

 “얘야! 그 박물관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 무엇이더냐?”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을 한다. “저 사실은 본건 하나도 없는데요.” 그 곁에 있던 학생도 동조하는 눈치다.

 한편 씁쓸하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나 어릴 적 수학여행에서 마지못해 다녔던 문화재에 대한 감상이 저 어린학생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남산에 들기 전에 삼릉입구에 위치한 경주별미 '삼릉 손칼국수집'으로 향한다. 다들 설레임 속에 아침을 걸러서일까? 무척이나 맛있게들 국수를 즐긴다. 여러 칼국수집을 다녀봤지만 이집 역시 독특한 면발과 국물이 제법이다. 이런 흐린 날에는 시중의 쫄깃한 바지락 칼국수 보다는 걸쭉한 국물에 따끈함이 제대로 배어나는 손칼국수가 제격인 법이다.


 배리삼릉. 언뜻 지명에서 짐작되듯이 역시 커다란 세 개의 릉을 일컬음이었다. 신라의 박씨 왕인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삼릉이다.

 꼭 경주다운 소나무숲속에 포온한 모습으로 나란이 자리한 모습이 그리 아늑해 보일수가 없다. 이런 날씨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제법 서늘함도 느껴지겠지만 나는 저 볼썽사나운 초록색 철담을 넘어 무덤위에 벌렁 드러누워 있고만 싶어진다.

 삼릉을 돌아 문득 바라본 소나무 숲. 아! 이것이었구나. 세계적인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씨가 그렇게 좋아하던 경주의 소나무가......

 한그루 한그루를 놓고 본다면 여늬 소나무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꼭 경주답다는 생각이 대번에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수령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나름의 조화로움을 만들어내는 저 기막힌 멋이란...

   <사진설명> 삼릉계 배리삼릉앞 소나무


 본격적으로 삼릉계를 오르면서 첫 번째로 조우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의 단아한 자세와 옷주름 무늬의 섬세함을 찬탄하면서 한편 아쉬움과 분노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대체 어느 시대 몽매함이 이토록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더없이 편안해 뵐 듯한 미소를 떼어 가져가버린 그 마음에 분노를 넘어선 측은함이 느껴진다. 뒤를 돌아 자연스럽고도 비례감 있게 흘러내린 옷맵시를 두부 깎듯 자연스레 표현한 아름다움에 그 아쉬움은 한층 더해진다.

 <사진설명: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려한 조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숨 속에 오른편으로 올라 ‘삼릉계 마애관음보살’의 입술에 내가 느낀 그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천년의 세월 속에 인간의 오만함을 지켜보고 입술을 꽉 깨물어 배어나왔을 그 핏물이 아직도 붉게 남아 후세를 경계하는 듯 하다.

 

 무거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다다른 ‘삼릉계 선각육존불’에서 어두웠던 마음이 대번에 환해짐을 느낀다. 평범한 바위암벽에 어찌 저런 아름다운 선을 그릴 수 있을까? 3차원 형상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심미안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려한 곡선으로 바위 속에 석가삼존과 아미타삼존을 나투시게 한 저 지극한 불심과 예술적 감각을 더 어찌 표현해 낼 것인가.

<사진설명: 삼릉계 선각육존불>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있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아미타삼존을 나타내었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인간의 편리성은 여지없이 감상을 뭉게뜨리고 만다. 산위로 향하는 길을 바로 그 머리위로 낸것이 아닌가. 무릇 길을 처음가는 자는 발걸음을 헛되이 디디지 말라고 하였거늘, 돌아가는 수고로움대신 편리함을 택한 탓에 이젠 자연스레 그리로 길이 나버리고 말았다. 허나 그로 인해 얻은 것도 있었으니 바로 불심의 지극함을 엿볼 수 있었음이다. 천연 바위에 선으로 새긴 탓에 풍수에 씻길 것은 당연한 일일테지만 바위 위쪽으로 홈을 내어 불상으로 직접 흐르는 물길을 돌려낸 홈이 바위 윗부분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남산 전체가 불국인지라 한정된 시간 안에 보아야 할 문화유산이 많은지라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참을 올라 저 멀리 경주들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에 새겨진 ‘삼릉계 선각여래좌상’. 섬세함 보다는 투박한 모습으로 그려내어 고려인의 선 굵은 기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아직 개안하지 않은 어린아이의 얼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마악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한 그 천진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감돌고 만다. 광배와 연좌로 장엄을 나타내려하였으나 무엄한 이 중생은 그저 해실 웃음이 나온다.

 

 웃음을 머금은 발걸음으로 도착한 ‘삼릉계 석불좌상’. 연꽃에 앉아있는 안정된 모습과 대조적으로 옷주름의 표현이나 허리의 굴곡은 여성스럽기 그지없다. 나도 모르는 이끌림으로 촉각으로 부처님을 느껴본다. 적당한 부드러움과 투박한 감촉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보기에 따라서는 천박으로 느껴질지 모르나 매만지고 있는 나의 느낌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한참을 그러다 문득 올려다 본 부처님의 얼굴.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아뿔사! 머리는 온전하되 이번에는 코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시멘트가 발라져 있다. 아! 이젠 탄식조차 미안할 정도다.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으로 오르는 길이 흥겹기는 커녕 힘겹기 그지없다. 지나치게 아낀 육신에 대한 응보일까. 훼손된 삼릉계 부처님들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일까.

 그러나 무거운 발걸음도 잠시, 이윽고 도착한 마애불의 모습에 입이 쩍 벌어진다. 절벽에 양각한 석가상의 모습이 그리 당당하고 온화해보일 수가 없다. 여태까지의 안타까움은 다 털어버리라는 듯이 특이한 모습의 연꽃대좌 위에 단아한 결가부좌의 굳건함과 엄숙한 인상에서 용맹 정진하던 믿음 깊은 불자들의 엄엄함이 느껴진다.

 <사진설명: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 높이 7m로 풍만에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로 삼고 삼릉에서는 가장 크게 조성되어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 불상의 머리 부분은 돌출하여 입체적으로 표현하였고, 그 아래는 섬세한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처님의 시선 따라 바라본 아득하게 보이는 산들의 어깨쌈이 그리 시원해 보일수가 없다. 굽어보는 시선 속에 담긴 속세를 함께 느끼고 싶었으나 그저 시원스럽다는 감상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미혹한 중생의 부족함이여......